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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메모

과학 기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 ANT와 <인간·사물·동맹> 리뷰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을 소개하는 책 <인간·사물·동맹> 리뷰입니다. 사물도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ANT의 관점이 AI·로봇 시대에 왜 다시 주목받는지 정리했습니다.

 

책 <인간·사물·동맹>

 
일상 속 기술은 흔히 인간이 만든 도구로만 여겨집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인간·사물·동맹>은 인간만이 아니라 사물과 기술 역시 세계를 함께 구성한다는 낯선 관점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읽기는 쉽지 않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집니다.
이 책은 과학기술학(STS)과 브루노 라투르의 ANT(Actor-Network Theory, 행위자-네트워크 이론)를 중심으로, 과학과 기술, 사회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 가는지를 탐색합니다.
 

과학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 과학 철학
과학 자체를 연구하는 학문, 과학 철학


<인간·사물·동맹>은 과학기술학(STS) 맥락에서 브루노 라투르의 ANT를 둘러싼 논의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다만 이 책을 단순한 이론 해설서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과학적 사실, 기술, 제도, 실험실, 사물, 인간이 어떻게 함께 얽혀 작동하는지를 새롭게 보게 만드는 책에 가깝습니다.
읽는 과정은 솔직히 쉽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ANT 관련 다른 책의 리뷰를 보고 흥미가 생겨 비슷한 주제의 책을 찾다가 이 책을 집었는데, 초반에는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아 여러 번 멈춰 읽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고 나면 한 가지 문제의식은 선명하게 남습니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사회는 인간만의 의도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사물과 장치, 제도와 환경까지 포함한 관계망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 AI와 로봇을 생각할 때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그럼, 이 책이 담고 있는 ANT의 깊은 세계를 살짝 소개해봅니다.
 

사물도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

ANT의 가장 낯설고도 인상적인 지점은 인간뿐 아니라 사물과 기술도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로 본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속방지턱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과속방지턱은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나 운전자의 속도를 낮추게 만들고, 도로 위 행동을 안정적으로 조정합니다. 즉,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도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도로 구조물, 교통 규범, 차량, 운전 습관 같은 여러 요소와 함께 만들어집니다.
ANT는 바로 이런 식으로 행위를 개별 주체의 속성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요소들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과속 방지턱은 사물이 직접적인 행위를 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속 방지턱은 사물이 직접적인 행위를 하는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ANT는 인간, 사물, 제도, 텍스트, 장치 같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하나의 네트워크 속에서 함께 보려는 시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연결이 실제로 어떤 행동과 결과를 만들어 내는가입니다.
라투르와 ANT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번역(translation)’은 이런 연결 과정에서 각 요소가 서로를 조정하고 역할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즉, 네트워크는 이미 완성된 구조가 아니라 계속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 지점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인간이 사물에 일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를 매개하며 의미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참 이해가 안 가서 이런 영상도 찾아봤었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nnvveMfjjo

'네트워크로서의 사물'로 근대 개념에 도전하다: 브뤼노 라투르

 

실험실은 사실을 ‘발견’하는 곳일까, ‘구성’하는 곳일까

라투르는 실험실 안에서 벌어지는 실험, 기록, 측정, 오류, 연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얽혀 ‘과학적 사실’을 만들어 내는지 주목했습니다. 과학은 진공 상태에서 순수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행위자들이 연결되고 조율되는 과정 속에서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작용이 모여서 과학이 됩니다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작용이 모여서 과학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학은 이미 완성된 진리를 단순히 드러내는 작업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인간과 비인간 요소들이 얽혀 하나의 사실을 안정화해 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흔히 ‘구조’라고 할 때는 고정된 틀을 떠올리지만, ANT의 네트워크는 정지된 그물망이라기보다 계속 만들어지고 재배열되는 흐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ANT의 network는 결과라기보다 과정이라는 느낌으로 읽는 편이 더 잘 이해됩니다.
 

인간과 기술의 대칭성: 닭과 달걀의 관계

이러한 관점은 인간과 기술, 사회와 사물을 처음부터 위계적으로 나누지 말고 가능한 한 대칭적으로 살펴보자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ANT에서 말하는 대칭성은 인간과 비인간을 완전히 같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의 출발점에서 어느 한쪽에 특권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인간(사회)과 기술은 닭과 달걀처럼 얽혀 서로를 정의합니다
인간(사회)과 기술은 닭과 달걀처럼 얽혀 서로를 정의합니다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인간(사회)과 기술은 어느 하나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하게 얽혀 서로를 정의합니다. 기술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가능해지고, 사회는 기술을 통해 자신의 형태를 재정의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기술을 일방적으로 지배한다거나, 반대로 기술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이 복잡한 공진화(Co-evolution)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대신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의 네트워크를 조율해 가는 '번역(Translation)'의 과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등의 개념이 인간을 넘어 사물의 영역까지 확장되는 독특한 지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인간의 능력을 흉내 내는(혹은 뛰어넘는) AI/로봇이 속속 나오고 있는 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화두이기도 하지요.
 

개인이 아닌 '배치'가 만들어내는 힘: 아장스망(Agencement)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아장스망(agencement)'이라는 말입니다. 이 용어는 보통 '배치', '배열', '결합', 혹은 문맥에 따라 'assemblage'에 가까운 의미로 이해하는 편이 낫습니다.

아장스망이란? "여러 요소가 함께 배치되고 연결됨으로써 새로운 기능이나 의미가 생기는 것."

우리가 보통 '행위자'라고 하면 의지를 가진 개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ANT는 행위 능력(Agency)이 개별 존재에게 고유하게 귀속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특정 방식으로 연결되고 조합되었을 때 비로소 발생하는 '효과'라고 정의합니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연결된 아장스망에서 행위 능력이 나옵니다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연결된 아장스망에서 행위 능력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발견이라는 행위 능력은 과학자 개인의 지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밀한 측정 기기, 데이터, 실험실의 네트워크가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아장스망)'되었을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동행'이나 '효과 창출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개별적인 '행위자'보다 이들을 묶어주는 '아장스망'이 이론적으로 더 타당한 개념인 이유입니다. 결국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은 개별 주체의 능력이 아니라, 이질적인 요소들이 적절히 배열되어 만들어낸 집합적 결과물인 셈입니다.
 

기술 설계는 곧 사회 설계이기도 하다

책의 후반부는 사물과 인간의 새로운 결합이 정치와 사회의 문제로도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어떤 관계를 가능하게 하고 어떤 행동을 더 쉽게 만들며 어떤 질서를 안정화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엔지니어링은 기능을 만드는 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기술이 어떤 연결망을 만들고, 어떤 사용 방식을 유도하며, 어떤 관계를 강화하는지까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NT는 과학기술과 사회를 분리해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술은 사회적 관계를 바꾸고, 사회적 맥락은 다시 기술의 형태와 쓰임을 바꿉니다. 두 영역은 서로를 지속적으로 형성합니다.

새로운 시야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새로운 시야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마무리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잠시 벗어나, 사물과 기술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지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도전해 볼 만한 책입니다.
특히 사물을 배경이 아니라 관계망의 일부로 보게 만드는 시선은, 익숙한 세계를 다르게 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ANT가 제시하는 관점은 단순히 이론 하나를 배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과학기술과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방식 자체를 조금 바꾸어 놓습니다. 


 
ANT와 제가 종사하는 IT 산업을 엮어보면 또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생기는데요. 이것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한번 풀어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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